덕수궁(德壽宮) - 경운궁(慶運宮), 정릉동행궁(貞陵洞行宮)
서울 시청 바로 옆에 있는 덕수궁은 조선시대 4대궁의 하나로 경복궁에 비해 궁궐로는 아주 작은 규모입니다. 도심의 한가운데 있으며, 덕수궁의 가까이에 시청역이 있어서 교통도 편리하여 외국인 관광객들도 많이 찾는 곳 같습니다. 건물들 주위로 큰 은행나무, 회화나무들이 울창하여 그늘을 만들어주고 있어 한 여름에도 쉬엄 쉬엄 여유를 가지고 다닐 수 있으며, 넓지 않아서 모두 둘러보아도 힘들지 않습니다. 입장료도 저렴하여 어른은 1,000원이고 24세 이하, 64세 이상은 무료입니다. 관람시간은 09:00 ~ 21:00(입장시간은 09:00 ~ 20:00) 매주 월요일은 휴궁일입니다. (2016.07.23 기준)
덕수궁은 서울특별시 중구 세종대로 99 (정동)에 위치한 사적 제124호로 지정된 우리의 문화유산입니다.
(출처: 문화재청 덕수궁)
덕수궁은 임진왜란 때 피난 갔다가 돌아온 선조가 머물 궁궐이 마땅치 않아서 월산대군의 집이었던 이곳을 임시 궁궐로 삼으면서 부터 궁궐이 되었습니다. 광해군이 창덕궁으로 옮기면서 경운궁(慶運宮)이라는 궁의 이름을 갖게되었습니다. 이후 경운궁은 행궁으로 사용되다가 조선말기 을미사변으로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아관파천(俄館播遷)에서 돌아온 고종이 경운궁으로 이어하여 정궁이 됩니다. 고종이 경복궁으로 가지않고 경운궁으로 온 것은 주위에 강대국 대사관, 공사관과 같은 공관이 많이 있어서 무슨 일이 발생하면 신변보호를 받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덕수궁은 피난갔던 왕들이 돌아와서 머무는 궁궐인지...;;;
1897년 고종이 대한제국의 황제로 즉위하여, 연호를 광무라 하고 경운궁을 정궁(正宮)으로 사용하였으며, 1907년 일제의 횡포로 고종이 퇴위되고 아들 순종에게 황위를 물려줍니다. 순종은 고종에게 장수를 비는 뜻으로 덕수 칭호를 올렸으며, 고종(덕수)이 사는 궁이라는 뜻으로 덕수궁이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순종은 창덕궁으로 이어하여 창덕궁이 정궁이 되었습니다. 덕수궁 내부에는 주위이 강대국 열강들의 영향을 받아서 궁궐 내부에 서양식 건물들이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대한문(大漢門)
덕수궁의 정문입니다. 원래 경운궁(덕수궁)의 정문은 남쪽에 있는 인화문(仁化門)이었다가 1904년 화재로 불타서 동쪽의 대안문(大安門)의 이름을 대한문(大漢門)이라 고치고 정문으로 삼았습니다.
궁궐의 정문은 백성을 교화한다는 의미로 화(化)자를 사용하는 데, 인화문이 불타 없어져서 동쪽의 대한문(대안문)이 정문이 되었다고 하네요. (경복궁: 광화문, 창덕궁: 돈화문, 경희궁: 흥화문, 창경궁: 홍화문)
매일 대한문앞에서는 수문장 교대식을 거행하고 있습니다. 수문장 교대식 규모 등은 경복궁보다는 작아 보입니다.
덕수궁의 대한문을 지나면 돌로 만든 금천교가 있습니다.
중화문이 있는 곳까지 시원한 숲길이 이어져 있습니다.
중화문(中和門)
중화문은 중화전(中和殿)의 정문으로 옛날에는 양쪽에 회랑이 있었다고 합니다.
중화전(中和殿)
중화전(中和殿)은 덕수궁의 정전(正殿)이다. 보물 819호로 지정되었고, 중화전이 세워진 월대는 상·하월대로 구성되어 있으며, 하월대는 3단으로 되어 있다.1902년에 처음 세워졌을 때는 본래 중층이었으나 1904년 화재로 1906년에 단층으로 다시 지었다. 투각곡병과 일월오악그림 병풍 앞에 어좌가 놓이고, 돌마당에는 문무백관의 지위와 위치를 나타낸 품계석이 세워져 있다. 원래 중화전 주변으로 회랑이 있었으나 일제강점기 때 철거되었으며 현재 중화문 동쪽에 일부가 남아 있다.(출처: 위키백과)
중화전 위의 잡상(雜像: 어처구니)입니다. 잡상은 액운을 막기 위하여 궁궐의 추녀마루에 만들어 놓은 토우입니다.
중화전 내부의 중앙에는 어좌와 왕권의 상징인 일월오악도가 그려져 있습니다. 오악(五嶽)은 우리나라의 5방위의 산들 즉, 국토를 의미하고 해,달,소나무,바다 등은 천계, 지계, 생물계를 뜻하며 한다고 합니다. 이는 왕의 권한이 미치는 모든 곳과 모든 것들이 왕 아래서 자손만대로 번창하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왕실의 무궁한 번영과 번창을 기원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천정에는 황금색으로 만든 한쌍의 용 모양이 만들어져 있습니다. 조선시대는 왕의 상징으로 용의 장식을 사용하였는 데, 용의 발가락 수가 4개 였다면, 덕수궁의 천정에는 5개의 발가락으로 이는 황제를 뜻합니다. 용의 발가락 수는 중국은 황제국이라 5개를 우리나라는 4개를 일본을 3개로 표현하고 있는 데, 고종 황제부터 5개의 발가락을 그린 것으로 보입니다. (경복궁 용의 그림들은 발가락이 4개로 그려져 있습니다.)
중화전 앞에 있는 용조각입니다. 역시 5개의 발가락으로 황제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석조전(石造殿)
석조전은 정면 54m, 너비 31m의 장대한 3층 석조 건물이다. 대한제국기 동안에 지어진 것으로,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신고전주의 양식의 석조 건물이다. 구한말 총세무사 브라운의 권유로 영국 사람 하딩(J. R. Harding)이 설계했다. 심의석(한국인), 사바틴(러시아인), 오가와(일본인), 데이비슨(영국인) 등이 감독으로 1900년 기공하여 1909년 준공했다. 그리스 건축을 조형(祖型)으로 르네상스 양식을 가미한 이른바 콜로니얼 스타일(식민지 양식) 건물로서 같은 모양의 건물이 18세기 이후 영국 식민지의 여러 곳에 세워진 바 있다. 대한제국의 고종황제가 집무실과 외국사신들의 접견실로 사용할 목적에서 지어졌는데, 1층에서는 시종들이 대기하고, 2층은 황제의 접견실, 3층은 황제와 황후의 침실과 응접실로 사용되었다. 석조전의 정원으로 영국인 하딩의 설계로 같은 기간에 서양식 정원과 분수대가 세워졌다. 석조전은 해방 후에는 국립박물관으로 사용되기도 하였고, 궁중유물전시관이 있었으나 경복궁 자리로 이전하였다. (출처: 위키백과)
석조전은 옛 중화전의 좌측 뒤편에 위치하고 있으며, 앞에는 분수가 있으며 이색적인 서양(그리스) 양식의 건물입니다.
석조전의 앞쪽 좌우에는 커다란 배롱나무(백일홍나무)가 아름답게 피어 있습니다.
석조전 서관
석어당(昔御堂)
석어당은 궁전에 지어진 건물 중 전각을 제외한 유일한 이층집이다. 1904년(광무 8년) 화재 후 중건하였고, 원래의 건물은 석어당은 선조 26년(1593년) 창건했었다. 한때 인목대비가 유폐되었던 곳이며, 역대 국왕들이 임진왜란 때의 어렵던 일을 회상하며 선조(宣祖)를 추모하던 곳이기도 하다.석어당은 정면 8칸, 측면 3칸이고, 위층이 정면 6칸, 측면 1칸인 굴도리집 우진각지붕이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서쪽 끝의 칸에 설치되었고, 2층은 칸막이 없이 넓은 공간으로 구성되었고, 사방에 창을 내었다. 궁내 건물임에도 단청을 하지 않아 가식이 없고 검소하며 소박하여 친근감을 준다.(출처: 위키백과)
덕홍전(德弘殿)
1911년에 건립된 덕수궁 내 현존 전각 중에 가장 나중에 건조된 전각으로 내외 귀빈이 황제를 알현하던 곳이다. 함녕전 서쪽에 있다. 정면 3칸, 측면 4칸의 이익공 팔작지붕으로 기단은 장대석을 3단으로 돌려 쌓고 알맞은 기둥 높이에 간결한 익공을 얹어 처마를 받게 하였다. 용마루에는 양성(양쪽으로 회반죽을 바름)하고 귀 마루에는 용두와 잡상을 얹어 잡귀와 화재에 대비하였고 지붕은 측면에 합각부를 가지고 있다. (출처: 위키백과)
함녕전(咸寧殿)
광무 1년(1897년)에 지어진 목조건물이다. 대형 건물로, 보물 제820호로 지정되었다. 정면 9칸, 측면 4칸에 한쪽 후면 4칸이 더 붙은 'ㄱ' 자형을 하고 있으며, 익공으로 결구된 간결한 건물이다. 고종(高宗)이 왕위를 물려준 다음 순종(純宗)이 창덕궁으로 옮기자 고종이 거처하던 침전(寢殿)이다. 함녕전 남쪽으로는 행각(行閣)이 있고 치중문(致中門)과 봉양문(鳳陽門)이 있으며 정문은 광명문(光明門)이다. (출처: 위키백과)
정관헌(靜觀軒)
궁궐 후원의 언덕 위에 세운 휴식용 건물로 이름에 걸맞게 조용히 궁궐을 내려보고 있다. 한국과 서양의 건축 양식이 혼합된 건축물로, 1900년경 러시아 건축가 사바찐이 설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인조석 기둥을 줄지어서 내부 공간을 감싸고, 동남서 세 방향에 베란다를 마련했다. 베란다의 기둥은 목조이며 기둥 상부에 청룡, 황룡, 박쥐, 꽃별 등의 한국의 전통 문양을 새겼다. 이 한식와 서양식의 절충한 이국적 건물 안에서 고종은 커피를 마시며 외교 사절들과 연회를 즐겼다고 한다. (출처: 정관헌 설명글)
준명당(浚眀堂) - 좌측건물
준명당은 1904년의 화재로 다시 지어졌다. 원래의 준명당은 정면 6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1897년에 새로 지은 내전(內殿)의 하나로 한때 고종이 거처하며 외국사신을 접견하던 곳으로, 후에 고종과 순종의 초상화를 봉안하였다. 준명당은 서쪽과 북쪽으로 가퇴를 덧달아 내놓았으며, 뒤쪽에 온돌방 4칸을 덧붙여 전체적으로 'ㄴ' 자형 평면을 이루고 있다.
즉조당(卽祚堂) - 우측건물
즉조당은 정면 7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덕수궁의 침전이다.임진왜란으로 의주까지 피난 갔던 선조가 난이 수습된 뒤에 돌아와 시어소(時御所)로 사용하였다. 1623년 반정으로 인조가 그곳에서 즉위한 뒤에 즉조당이라 불린다. 1897년 고종이 경운궁으로 옮겨온 뒤 1902년 중화전이 건립될 때까지 정전으로 사용되었다. 1904년 화재 후 중건되었다. 이후 고종의 후비인 엄비(嚴妃)가 순종 융희 원년(1907년)부터 1911년 7월 승하할 때까지 거처하였다.
광명문(光明門)
원래 침전인 함녕전의 남쪽 대문이었으나, 1904년 화재로 소실되어 현재는 문만 남아 있으며 1938년에 석조던 서관을 증축하며 옮겨 왔습니다. 현재의 위치는 대한문에서 중화문을 지나 쭉 직진하면 나타나는 데, 이곳에는 자격루(국보 제229호), 1462년에 제작된 정릉동 홍천사명 동종(보물 졔1460호), 신기전기화차 등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그 외 풍경들...
덕수궁의 준명당, 즉조당 뒤편으로는 숲이 우거진 조용한 산책로가 있어서 더운 열기를 식혀갈 수 있습니다.
덕수궁은 임진왜란의 아픔과 조선시대 말기의 대한제국을 통한 주권을 지키려는 우리민족의 노력과 일제의 압박에 대한 한이 서려있는 궁입니다. 덕수궁이라는 이름에 대해서도 일제의 잔재이므로 경운궁(慶運宮)으로 바꿔야 한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 아픔을 간직한 이 덕수궁도 우리가 보존해야 할 유산입니다. 넓지 않아서 아이들과도 힘들지 않고 모두 돌아 볼 수 있는 곳, 덕수궁으로 가보세요.
#덕수궁 #경운궁 #정릉동행궁 #조선 #궁궐 #palce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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