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晋州城) : 사적 제 118호
나의 고향 진주는 충절의 도시, 교육의 도시, 실크(비단)의 도시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진주하면 떠올리는 것은 촉석루, 진주성, 논개, 남강 유등축제, 소싸움(소싸움의 발원지), 진주대첩 등 일 것입니다. 고등학교 시절 매주 일요일 아침마다 학년별로 돌아가면서 진주성의 후문인 호국사(護國寺), 창렬사(彰烈祠) 근처에서 빗자루를 들고 청소하고, 임진왜란 진주성 전투에서 장렬하게 순국하신 분들을의 위패가 모셔진 창렬사(彰烈祠)에서 향사르고 묵념했던 그 곳! 임진왜란 3대 대첩 중 하나인 진주대첩이 벌어졌던 곳, 진주성을 찾았습니다. 연일 무더위가 맹위를 날리며 더위에 대한 기록이 갱신되고 있는 2016년 8월 11일에 방문하였는 데, 날씨가 너무 덥고 평일이라 성안이 텅텅비어 있어서 사진찍기에 좋았(?)습니다. ;;;
진주성 입장 시간은 05:00 ~ 23:00(동절기 ~ 22:00)이며, 입장료는 진주시민(주민등록증 상)은 무료입장이며 타지사람들은 09:00 ~ 18:00까지는 어른 2000원, 청소년 1000원이며 야간에는 무료입장입니다. (2016년 8월 11일 기준)
진주교(晋州橋)에서 바라본 남강(南江)과 진주성(晋州城)
진주교(晋州橋)에서 바라본 남강(南江)과 진주성(晋州城)
남강 건너편에서 바라본 촉석루(矗石樓)
남강 건너편에서 바라본 촉석루(矗石樓)
진주성입구 촉석문(矗石門)
진주성입구 촉석문(矗石門)
촉석문앞에 있는 수주(樹州) 변영로(卞榮魯) 시인의 논개(論介) 시비
논개(論介)
- 수주(樹州) 변영로(卞榮魯)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불붙은 정열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아리땁던 그 아미
높게 흔들리우며
그 석류 속 같은 입술
죽음을 입맞추었네
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 꽃보다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흐르는 강물은
길이길이 푸르니
그대의 꽃다운 혼
어이 아니 붉으랴
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촉석문(矗石門)
진주대첩은 왜군 2~3만명과 3,800여명의 조선군 및 민간인이 1592년 11월 7일(음력 10월 4일) ~ 11월 12일(음력 10월 9일)까지 6일간 벌어진 제1차 진주성 전투를 말합니다. 임진왜란 발발후 쉽게 한양을 함락한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군량미를 조달하기 위하여 호남지역을 손에 넣어려고 하였으나 이순신 장군에 의하여 막히자, 육지를 통한 호남지역 함락을 위한 교두보를 확보하고, 의병활동이 왕성한 중심지역으로서 의병의 본거지를 없애기 위하여 진주성을 점령하라고 명령합니다. 진주목사 김시민장군은 진주성을 지키던 조선군과 민간인(여자들도 남장을 하게 하여)을 포함 3,800명으로 진주성을 방어합니다. 왜군의 침공을 알고 영남의 의병장 곽재우 장군과 호남의 의병장 최경회 장군 등이 외곽에서 지원을 하였으며, 조선군과 왜군간의 고도의 심리전을 펼치면서 6일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임진왜란 이후에 조선이 처음으로 수성(守城: 성을 지켜냄)한 전투입니다. 조선은 김시민 장군을 포함 1,000여명이 사상하였으며, 왜군은 지휘관급 300명을 포함 10,300여명이 사상자가 발생하였습니다. 이 전투는 왜군의 본진인 부산의 정예병이 치밀하게 준비한 전투였으나 패하여 왜에는 엄청난 충격이었다고 합니다. (상세내용은 제1차 진주성 전투)
촉석루(矗石樓) - 남장대(南將臺), 장원루(壯元樓)라고도 함.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8호)
진주성의 남쪽 벼랑 위에 솟은 촉석루는 영남제일의 아름다운 누각임을 자랑합니다. 고려 고종 28년(1241년)에 김지대가 창건한 후 여러 차례 고쳐 지었습니다. 촉석루라는 이름은 '강 가운데 돌이 우뚝 솟은 까닭'의 의미입니다. 전시에는 진주성을 지휘하는 지휘본부였으며, 평화로운 시절에는 시인 묵객들이 풍류를 즐기던 명소로, 또 과거를 치르는 고사장으로 쓰이기도 했습니다. 6.25 전쟁이전에는 국보 제276호로 지정되었으나 전쟁으로 불탄 것을 국비, 도비, 시비와 시민의 성금으로 1960년에 복원하였습니다.
진주목사 충무공(忠武公) 김시민(金時敏) 장군 동상
임진왜란의 또 한 명의 충무공
많은 사람들이 충무공하면 이순신을 떠올립니다. 진주대첩을 승리로 이끈 김시민 장군도 이순신과 같은 충무공입니다.
김시민 장군은 1554년 충남 천안 병천에서 태어나 1578년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1591년 진주판관이 되었습니다.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목사가 병으로 죽자 그 직을 대신하였으며 성(城)을 보강하고 해자를 수축하는 한편 무기를 정비하고 군사체계를 갖추어 사천, 고성, 진해, 지례, 금산 등지에서 승전하면서 목사로 승진하였습니다. 1592년 10월(음)에 3,800명의 군사로 2~3만명의 왜군을 무찔렀으나 왜병의 총탄에 맞아 치료중에 몇 일 후에 순절하였습니다. (상세 자료는 김시민)
최근에는 김시민 장군의 뜻을 기리기 위하여 진주시는 혁신도시의 동을 충무공동으로 명명하고 충무공동과 진주 중심을 잇는 다리를 김시민교라고 명명하였습니다.
김시민 장군 전공비(金時敏 戰功碑) -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호
이 비는 임진왜란이 끝난 후 진주 고을 백성들의 열망에 의하여 광해군 11년(1619년)에 세워졌는 데, 성균관 진사 성여신이 글을 짓고 성균관 생원 한몽인이 글씨를 썼다고 합니다.
제1차 진주성 전투의 패배는 왜에게 큰 치욕으로 남겨졌고 진주목사의 이름을 몰라서 목사를 모쿠소라고 부르며, 김시민 장군(모쿠소)은 일본의 문학에도 악인의 상징으로 일본의 전복을 꽤하는 요술쟁이 반역자로 묘사되었다고 합니다. 텐지쿠 도쿠베에 (天竺德兵衛)라는 소설의 주인공 텐지쿠도쿠베의 아버지가 김시민장군이라고 합니다. (출처: 텐지쿠 도쿠베에)
촉석정충단비(矗石旌忠壇碑) -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호
이 비는 선조 26년(1593년) 6월 19일 ~ 29일 사이에 있었던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장렬하게 순국한 삼장사(三壯士) 김천일(金千鎰), 황진(黃進), 최경회(崔慶會) 및 군관민의 영령을 제사하기 위하여 세운 정충단의 비석입니다.
제2차 진주성 전투는 1593년 7월 20일(음력 6월 22일)부터 같은 달 27일(음력 6월 29일)까지 진주성에서 벌어진 전투입니다. 1593년 왜군은 평양성에서 패배하고 휴전회담이 진행되면서 남해안까지 철수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협상의 우위를 점하고 제1차 진주성 전투의 보복을 위하여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전군에 진주성을 공격할 것을 명합니다. 왜군 9만 3천의 전군이 진주성으로 몰려들었고 대구에 있던 명나라는 진주성 방어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였습니다. 왜군 측에서도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진주성 함락에 대한 의지가 확고해서 물러설 수 없는 상황이라 자신들이 공격하기 전에 민간인은 진주성에서 내보내라고 권고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진주성에 주둔한 조선군은 전라도로 넘어가는 길목이라 진주성만 확보하고 물러나지 않을 것이라고 여겨 성을 포기하라는 명나라와 왜의 권고를 거부하였습니다. 곽재우, 선거이, 홍계남 등 조선군들도 절대적인 병력차이를 확인하고 진주성 구원을 포기하였다고 합니다. 10일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6천(군인 3천, 민병 3천)명의 조선군을 포함한 6만여명이 전멸하였고, 왜병 3만 8천명이 전사한 끝에 진주성이 함락되었습니다. (상세내용은 제2차 진주성 전투)
의기사(義妓祠) - 논개(論介) 사당
논개(論介) 영정
논개는 제1차 진주성 전투 시에 의병장으로 참전하고,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경상우도병마절도사로 참전했던 최경회의 후처입니다. 주논개는 전북 장수 출신으로 몰락한 양반의 딸로 태어나서 부친이 40살에 태어난 외동딸로 부친이 별세하자 숙부집에 의탁하였습니다. 숙부가 벼 50석에 김부호의 민며느리로 혼인시키려 하자 이를 피해 모친과 달아나자 김부호는 장수현감 최경회에게 모녀를 기소합니다. 최경회는 혼인하지 않아도 된다고 판결하였고, 풀려나면서 갈곳이 없어서 최경회의 관저에 의탁합니다. 성년이 된 논개는 최경회의 후처가 됩니다. 최경회는 모친상으로 인하여 벼슬을 그만두었을 때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전라우도의 의병장이 되어 제1차 진주성 전투에 참전하여 승전하면서 경상우도병마절도사가 되어 진주성으로 갑니다. 1593년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치열한 전투 끝에 진주성이 함락되자 진주 남강에 투신합니다. 논개는 남편의 죽음을 복수하기 위하여 스스로 기녀가 되어 왜병의 승리 축하연에 참석하여 의암에서 왜장을 끌어안고 남강에 투신하였습니다.
의암(義巖)
진주성 근처에 있는 진주교에 있는 논개의 금가락지
논개는 왜장을 안고 남강에 뛰어들 때에 손가락의 깍지를 끼면 손을 뺄 수 없도록 양손에 금가락지를 끼었다고 합니다.
쌍충사적비(雙忠事蹟碑) -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호
제씨쌍충비라고도 부르는 이 비는 임진왜란 때 크게 전공을 세운 성주목사 제말(諸末)과 이순신 장군을 도와 큰 공을 세운 제말 장군의 조카인 제홍록(諸弘錄) 장군의 충의를 기리고 있습니다. 이 비를 쌍충각이라고 이름 짓고 진주성과 성주성에 각각 세우게 하였다고 합니다.
진주성의 안팍으로는 팽나무, 느릅나무, 느티나무 등 고목들이 많이 있습니다.
연리근(連理根) - 두 나무(팽나무, 느릅나무)의 뿌리가 붙어서 한 나무처럼 보이는 현상으로 사랑나무라고 부릅니다.
영남포정사(嶺南布政司) -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3호
진주성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건물로 광해군 10년(1618년)에 병마절도사 남이호가 2층으로 신축하였으며, 조선시대 경상우도 병마절도영의 문루입니다.
공북문(拱北門) : 진주성의 정문 - 북쪽에 계신 임금님을 향해 두 손을 모아 공경의 뜻을 표한다는 뜻입니다. (2002년에 복원함)
북장대(北將臺) 또는 진남루(鎭南樓) - 진주성의 북쪽 지휘소
진주성 포루 - 내외성 포루 12좌가 설치되었으나 상징적으로 1개소만 복원함.
서장대(西將臺) - 서쪽 지휘소로 앞쪽에는 높은 절벽이 있습니다.
제가 고등학교에 다니든 시절 저희 학교에서는 매주 일요일(예전에는 토요일도 학교에 갔기 때문에)마다 전교생이 번갈아가며 창렬사 - 호국사 - 서장대 주변을 빗자루를 들고 와서 청소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청소가 끝나면 모두 창렬사(절이 아니고 사당입니다.)에 모여 임진왜란 때 순국한 김시민 장군, 삼장사 및 진주시민들을 위한 향불을 올리고 묵념의 시간을 가졌던 곳입니다.
창렬사(彰烈祠)
유중문(有重門) - 창렬사 외삼문으로 문을 들어서면서 몸과 마음을 굳건히 하라는 뜻입니다.
전파문(傳葩門) - 헌화하다(꽃을 전하다)는 뜻입니다.
창렬사(彰烈祠)
창렬사 중앙에는 김시민 장군을 포함한 7위(진주목사 충무공 김시민, 창의사 문열공 김천일, 충청도 병마절도사 무민공 황진,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충의공 최경회, 충의공 장윤, 효열공 고종후, 이조판서 유복립)의 신위가 모셔져 있으며 좌우에는 32위의 신위가 모셔져 있습니다.
제장군졸지위(諸將軍卒之位) - 그 외 장수와 병졸을 위한 추모비
호국사(護國寺)
고려시대에 창건된 이 절은 내성사(內城寺)였다고합니다. 고려말기에 왜구를 막기 위해 진주성을 고쳐쌓고 승병을 양성하기 위해 창건된 것으로 임진왜란때에는 승병의 근거지가 되었습니다. 조선시대 숙종때에 임진왜란 때 진주성 전투에서 전사한 승병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호국사라는 이름을 내렸습니다.
진주성 비석군(진주성 또는 시내에 있던 비석을 한곳으로 옮긴 곳)
경절사(擎節祠)
경절사는 고려시대 충절신 하공진(河拱辰) 장군의 영정과 위패가 모셔진 사당입니다. 하공진은 문신으로 진양(진주) 하(河)씨 시랑공파의 시조입니다. 거란의 2차 침입 당시에 하공진은 볼모를 자청하는 조건과 여러가지의 명분으로 거란 군대를 철수하게 하였습니다. 볼모로 잡혀간 후에도 고려로 탈출하기 위하여 준마를 사서 고려로 가는 길에 배치하여 귀국을 꾀하다가 발각되어 국문을 당하면서 요의 신하가 될 것을 요청하였으나 거절하여 참형에 처하여 지고 간은 꺼내져 씹히기 까지 하였다고 합니다. (진주하씨는 시랑공파의 시조 하공진(河拱辰), 사직공파의 시조 하진[河珍], 하성[河成]의 3가지 계통)
참고로 河자를 사용하는 하씨와 姜자를 사용하는 강씨는 모두 본이 진주(진양) 또는 분파입니다. 진주강씨의 시조는 고구려의 장군(수륙양군병마도원수) 강이식(姜以式)장군입니다.
청계서원(淸溪書院)
청계서원은 고려병부상서로 거란의 침입을 물리친 진양부원군 은열공 관정 정신열 선생과 고려 공민왕때에 우리나라에 목화씨를 가져온 문익점의 장인으로 3년간의 노력으로 목화 재배에 성공하였으며 목화씨를 뽑는 씨아와 실을 뽑는 물레를 발명한 진양군 문충공 퇴헌 정천익 선생을 모신 곳입니다.
고향 진주에 있는 진주성은 넓지 않지만 오래된 고목들이 많이 있으며 성의 곳곳에 충신들의 위패가 모셔져 있어 진주가 왜 충절의 도시인지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고향 진주를 자주 방문하면서도 상세히 돌아보지 못하였는 데, 이번에 휴가를 맞아서 찌는 듯한 더위 속에서도 보람있는 하루를 가졌습니다. 진주성 내에는 국립 진주박물관이 있어서 무료 관람을 할 수 있습니다. 현재는 지붕의 기와 공사를 하고 있어서 사진은 촬영하였으나 올리지 않았습니다. 국립진주박물관에는 진주 지역이 옛 가야 지역으로 철기시대(철은 녹이 잘 슬어서 형체만... ;;;)의 유물이 많이 전시되어 있으며, 임진왜란과 관련된 자료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가을 10월에 개천 예술제와 그 기간에 진행하는 남강유등축제(제가 고등학교에 다닐때에는 중고등학교에서 큰 유등을 1점씩 만들어서 남강에 띄웠습니다. 지금은 대규모의 유등축제로 되었더군요.)때에 진주성을 방문하는 것도 좋을 듯 합니다.
고향에 대한 글을 적으면서 혹시 잘못 적은 것이 있을까 두려워요....
'여행 > 전통'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창덕궁(昌德宮) (0) | 2016.11.23 |
---|---|
은행나무 - 성균관 (1) | 2016.11.15 |
덕수궁(德壽宮) - 경운궁(慶運宮), 정릉동행궁(貞陵洞行宮) (0) | 2016.07.31 |
성균관(成均館) - 조선시대 최고의 고육기관 (0) | 2016.07.24 |
경복궁(景福宮) - 향원정(香遠亭) (2) | 2016.06.30 |